Wednesday, 14 October 2009
Friday, 9 October 2009
죽음의 주위를 맴도는 아직 손상되지 않은 자들의 춤
죽음의 주위를 맴도는 아직 손상되지 않은 자들의 춤.
분명 매우 섬뜩하게 들리고야말-그래서 크게 환영받지 못할- 이 어구(語句)는 내가 옥인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다. 사실 이 문장의 강렬한 출현은 철거를 앞두고 거의 비어버린 옥인아파트와 옥인아파트를 둘러싼 사건의 정황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곳에 처음 모인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대한 것이었다.
그 순간, 무엇이 우리를 달아오르게 한 것일까.
물론 텅 빈 아파트에 남겨진 최후의 세입자가 될지 모를 동료 작가가 있고, 모인 이들 대부분 나름의 방식에서 폴 어쿠스틱의 랩에 등장하는 ‘알티비스트(artivist)’적 성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내게 있어 그 날의 교감은 그리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요 며칠 간 나는 이 문장의 출처를 고심했는데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새물결刊)을 생각해내고, 거의 두 시간 여에 걸쳐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앞뒤로 뒤적인 끝에 마침내 원래의 문장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9장 ‘1933년-미시정치와 절편성’에 쓰인 원래의 구절은 ‘죽음’이 아니라 ‘시체’ 즉 ‘시체 주위를 맴도는 아직 손상되지 않은 자들의 춤!’으로 원전의 문맥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파시즘을 비판하기 위해 저자들이 인용한 소설 <멤피스토> 중 나치의 통상적인 대화를 묘사한 부분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원전의 문맥이야 어찌됐든 나의 무의식이 연결시킨 단서들에 의하면 옥인아파트에 대한 우리의 흥분은 작업이나 투쟁 이전에 보다 원초적인 죽음 혹은 사라짐과 연관이 있으며 이는 생로병사를 말할 때와 같은 그런 자연스러운-그러므로 너무나 마땅하여 우리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죽음이라기보다는 교사되어진 것, 어쩌면 비천하게 탄생하여 비천하게 사망하는 것에 대한 비릿한 우애 혹은 비천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아직은’ 손상되지 않은 자들의 연대감, 또는 ‘아직은’ 누구의 소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무덤-놀이터에 대한 탐닉일지도 모른다.
* 위 글은 아직은 메모에 불과하니 퍼가지 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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