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초부 블로그의 무계정사(武溪精舍) 글에서 부분 발췌해서 가져왔삼.
고서에서 찾아보는 이동네~^^옛날 중국 무릉도원(武陵桃源)이나 근년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에 나오는 샹그리라(Sangri-La 香格里拉)가 대표적 예다.
조선 초기 어느 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카피본 같은 꿈을 꾼다.
정묘년 (1447년, 세종 29년) 4월 20일 밤에 내가 막 베개를 베고 누우니,
정신이 갑자기 아뜩해지며 잠이 깊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문득 보니
인수 박팽년(仁? 朴彭年)과 함께 어느 산 아래에 다다랐는데, 겹친 봉우리는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는 그윽하였으며 복사꽃 핀 나무 수십 그루가 서있었다.
오솔길이 숲 가장자리에서 밖에 두 갈래로 나뉘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시골 옷차림을 한 사람이 나왔다.
그는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바로 도원입니다 ' 하는 것이었다.
인수(=박팽년)와 내가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 보니 절벽은 깎아지른 듯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다. 또 시내가 굽이지고 길은 꼬불꼬불하여 마치
백 번이나 꺾여 나간 듯 곧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골짝에 들어서자 골 안은 넓게 탁 트여서 족히 2, 3리는 될 듯 했다.
사방엔 산들이 벽처럼 늘어섰고 구름과 안개는 가렸다가는 피어 오르는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숭아나무로 햇살에 얼비치어 노을인양 자욱했다.
또 대나무 숲 속에 띠풀 집이 있는데 사립 문은 반쯤 닫혀 있고 흙 섬돌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이며 개, 소와 말 따위도 없었다.
앞 냇가에 조각배가 있었지만 물결을 따라 흔들거릴 뿐이어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중략(中略)
그리하여 가도 안견(可度 安堅)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 본다면 반드시 무어라 할 말이 있으리라. 꿈꾼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아래는 위 내용을 적은 안평대군 친필이다. 대군이 명필로 이름났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 후 역적으로 몰려 죽어 남은 글씨가 많지 않다.
끝에 비해당(匪懈堂) 글자가 있다. 말미에 또 적지만 비해당은 옥인아파트
부근에 있던 안평대군 살림집이다. 깨어난 대군(大君)이 안견(安堅)에게 꿈에서
본대로 그리라 하여 사흘 만에 완성했다는 것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다.
사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세종 29) 작.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106.5×38.7 cm, 어떻게 국외(國外)로 나갔는지,
지금은 일본 천리(天理)대학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아무리 이름 높은 ‘몽유도원도’ 라고 한들 인터넷에서 퍼온 우표보다 약간
큰 사진가지고는 실감하기 어려울 것으로, 아래 평(評)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두루말이를 여는 순간 우리는 대뜸 펼쳐진 황홀한 무릉도원의 전경(全景)에
압도된다. 마치 궁중아악(宮中雅樂) 수제천(壽齊天)의 시작을 알리는 전경에
박(拍) 소리가 그치자 모든 악사들이 일제히 강박합주(强拍合奏)로 장엄한
첫 음을 울리는 것처럼 안개 자욱한 무릉도원은 꿈결같은 향기를 온 누리에
퍼뜨리며 화평한 기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빨간 복사꽃잎의 꽃술에는
금가루가 반짝이고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 싼 기괴한 봉우리들은 각광(脚光)을
받아 얼비친다. 아래가 밝고 위가 어두운 봉우리 봉우리는 신비롭기가 그지 없으니
분명 현실세계가 아닌 신선의 경계다...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권 1) p 56-58 중 안견의 몽유도원도
꿈보다 해몽이 좋은지 ? ‘얼쑤’가 있은 연후에 비로소 소리에 흥이 나는지?
아마추어들에게 이렇게 발림과 추임새를 해 주는 것이 전문가 역할 아닐지?
이 미려한 필치의 오주석 씨는 학문이 막 무르익을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몽유도원도는 한 편의 장대한 교향시다. 작품의 기본축은 오른편 위쪽에서
왼편 아래쪽으로 가로지르는 호쾌한 대작이다. 그리고 보조축으로 오른편
아래에서 왼편 위쪽을 향해 점차 상승하는 대각선이 교차된다.- 오주석
아래는 몽유도원도의 오른 편 도원경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인터넷이 아니라
종이 책에서 스캔 했으니 위 전도 보다 낫게 보일 것이다.
화면 상부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기암(奇巖)으로 환상을 극하는 절경의 분위기를 내고
몸이 하늘에 떠서 내려다본 듯이 도원 전체를 폭 넓게 조망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드넓은 도원의 동시묘사는 과연 천재에게나 가능한 경지리라.
오른 편 위쪽에는 아담한 집이 세 채 보이고 한중간에는 빈 배가 물가에서 출렁인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자욱한 안개 속에 화사한 복사꽃이
오히려 너무 고와 서러울 지경이다, 이 적막하고 아득한 경지를 보노라면
안견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그 궁극에서 비애감으로 이어진다' 는 진리를
익히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오주석
무계정사 (武溪精舍)
안평대군은 자신이 꾼 꿈을 안견을 시켜 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무계정사 (武溪精舍)라는 도원경을 본뜬 별장을 실제로 지었다고 한다.
…이개(李塏)가 1451년 (문종 1년)에 쓴 무계정사기(武溪精舍記)에 의하면,
무계는 한양성 북문 (즉 창의문)밖 백악산(白岳山) 서북쪽 산기슭 지금
종로구 부암동 329의 4번지 일대다.
중략
(살림집보다 별장이 더 뷰가 좋은곳이었겠지만서도 별장 부암동 이야기는 중간생략 ^^)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별장이었고 대군의 살림집은 따로 성안에 있었으니
지금 옥인아파트 근처로 당호(堂號)가 비해당(匪懈堂)이었다.
비해당(匪懈堂)
아닐 비(匪) 게으를 해(懈)니 게으르지 말라는 뜻으로 세종대왕이 직접
시경 증민(蒸民) 편에서 두 글자를 따 지어 주었다고 한다.
숙야비해 이사일인 (夙夜匪懈 以事一人)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행여 한눈 팔지 말고 형님-다음 대 임금(문종)을 지성으로 섬기는 데만 정신을
쏟아라 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뜻이야 어찌되었든 금지옥엽(金枝玉葉)
귀하디 귀한 왕자의 몸으로 시서화 또한 당대 제일이던 안평대군에게 어울리게
저택이 빼어났다고 한다. 그 저택 비해당(匪懈堂)은 지금 옥인아파트 자리로 추정한다.
…..그의 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는 뜻의 수성동(水聲洞) 기린교(麒麟橋)
부근에 따로 있었다. 수성동은 옥인아파트 자리라고 추정되는데, 1960년대에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기린교를 없앴다고 김영상 선생이 증언하였다.
서울신문 연재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허경진) 중에서
사진: 옥인아파트 앞
지금 겉모습으로는 도저히 ‘시내와 바위의 빼어남’ 과 연결이 안 된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 안 인왕산에서 내려 오는 냇물과 바위에서 상상력을
극도로 발휘하면 옛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사진: 옥인아파트 단지 내 냇가 바위.
아파트와 시멘트 등 구조물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래도 어려우면 겸재의 그림을 통해 그려 볼 수 밖에.
수성동(水聲洞), 영조 27년 (1751) 경,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종이에 엷은 채색, 29.5 x 33.7 cm, 장동팔경첩 간송미술관 소장
….둥근 바위 벼랑이 내려와 우뚝 멈춘 아래에 널찍한 평지가 있고
그 앞뒤로는 수직의 바위 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평지 아래로는
계곡 물이 힘차게 흐른다. 인왕산 동쪽 기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터전은 남향집을 지을 수 있는 집터였을 듯하다. 물론 동향을 한
사랑이나 누각 위에서라면 경복궁을 비롯한 한양 도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 소리가 마당 가에서 여울지고
솔바람이 밤낮없이 송뢰(솔바람소리)를 일으키며 흰 빛 바위가 사시장철
청결 고아한 자태로 (*)울싸주는 곳이니 바로 선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겸재의 한양진경(최완수) p21
(*)울싸주는 : 귀에 설어 사전을 찾았는데 나오지 않는다. 문맥상 ‘얼싸다’
정도의 뜻인 듯. 최선생이 새로 만든 말이거나 선생의 고향-충남 사투리 일지도.
사진: 옥인아파트 일대를 구글에서 잡아 봄.
화용 잘 읽었어요 굉장히 재밌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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